사랑은 어디로 - 10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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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한참 동안 내려다 보던 김지연이

창가에서 뒷걸음질치듯이 물러서더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혜승보다 한 해 전에 자살한 여자라고 했다.

혜승은 귀신이 되었을 때 김지연의 영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혜승이 살아 있는 지금,

저 집에 깃들어 있는 영이라면 당연히 김지연일 것이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귀신이 무섭냐고?

잠깐이긴 해도, 귀신과 동거까지 해 본 나다.

귀신과 섹스까지 한 나다.

하지만 김지연 그 여자만큼은 왠지 섬찟했다.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뭔가 내키지 않는 존재였다.

하지만 나에게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는

김지연 뿐이었다.



나는 김지연이 사라진 5층의 창문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 엘리베이터를 타면

존재하지 않는 그 6층으로 다시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그녀를 만난다면

지금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난 천천히 집 쪽으로 다가가다가 이내 다시 멈추어 섰다.

겁이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귀신이 겁이나는게 아니었다.

그렇게 6층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1층으로 내려왔을 때

2013년으로 돌아와 있으면 어떻게하지?

내가 겁이나는 것은 그것이었다.

2011년으로 돌아온 일주일 동안, 희영은 날 보고 많이 변했다고 그랬다.

그러나 내가 변한 것과는 상관없이

내 상황 자체는 아직 변한게 없다.

그것을 그대로 남겨둔 채 2013년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여전히 두려운 일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주저하고 있는데

때마침 현관에서 걸어나오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깜짝 놀랐다.

손혜승이었다.

놀라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혜승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난 본능적으로 그녀가 비명을 지르려고 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기서 혜승과 문제를 일으켜서는 안된다.



“손혜승씨,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난 그녀에게 멈추라고 명령이라도 하듯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혜승은 굳어있었다. 그녀는 아무 대꾸 없이

두손으로 꼭 쥔 스마트폰을 가슴께로 가져갔다.

“저 스토커도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이런 말을 한다고 해도 그녀가 안심할리가 없었다.

나도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나..나를… 어떻게 아는 거죠?”

혜승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건가?

2013년에 귀신이 되어 나타난 당신과 같이 지내던 남자라고 얘기하면 믿어줄런지?

그게 아니라면 거짓말을 둘러대야 하는건지.

하지만 적당한 거짓말을 찾기엔 그녀와의 조우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이 곳에 온 것 자체가 무슨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대답이 궁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사실을 말하기로.



“정말 미친 소리로 들릴거라는 거 잘 아는데요.”

내 말을 듣는 혜승의 눈동자는 겁에 질린 듯 흔들리고 있었다.

“우리 2년 후에 만났어요.”

2년후에 만났어요라니, 문법적으로 시제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 문장이었지만

나로서는 나와 혜승의 상황을 가장 적확하게 설명하는 말이었다.

“뭐라고요?”

혜승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우리 2013년에 만났습니다. 바로 저 집에서요. 아다지오 빌라 511호.”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그녀가 말을 놓았다.

그래 혜승에게는 존대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이렇게 반말을 들으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내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나도 말을 놓았다.

이게 우리다운 것이었다.

“무슨 말같은 소리를 해야지.”

그녀의 눈빛에선 경멸이 흘러넘쳤다.

난 주머니에서 열쇠꾸러미를 꺼내 혜승에게 던졌다.

“거기에 있는 동색 딤플키카 511호키야. 너도 가지고 있을테니 잘 알거라구.”

“당신이 이걸 왜 가지고 있어?”

“내가 무슨 스토커라도 되서 카피뜬거라고 생각하지마. 그 키 웬만해선 카피 안되는 거니까.”

혜승은 한쪽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그 집 샤워 수압이 낮아 아침저녁으로 물이 쫄쫄거리지?”

혜승은 대답없이 날 노려보기만 했다.

“씽크 안쪽에 붙어있는 배달집 스티커들은 진짜 지저분하고 말야.”

혜승은 여전히 날 째려봤다.

“세탁기 물 안내려가서 호스 잘못놨다간 물벼락맞고.”

혜승은 말이 없었다.

“에어컨은 LG가 아니라 골드스타잖아.”

“당신 내 집에 들어왔었지?”

혜승은 목소리를 높혔다.

“아니, 아까도 말했잖아 나 그런 사람 아니라고.”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아냐고? 나 그 집에서 살았거든.”

“언제?”

“2012년7월부터.”

그녀는 기가막히다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지금 장난해?”



난 한숨이 나왔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승산이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혜승으로 하여금 내 말을 믿게 만들 자신이, 나에겐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실을 말하겠다고 덤벼든 내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물러설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나 지금 아주 심각해.”

“그런 말같잖은 소리하면서?”

“만일 내가 너 스토커라면 여기서 너 붙잡고 이런 얘기 안할거야. "

난 혜승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너를 강간이라도 할 목적이라면 벌써 행동에 옮겼을 거고.”

“나 그런 말같잖은 소리 듣고 있을 시간 없으니 여기서 사라져줄래?”

혜승은 날 노려 보며 말했다.

“좋아, 너가 믿건 말건 내가 왜 너를 아는지 얘기해 줄게. 그 말만 하고 사라질테니까.”

내 수중에 내가 2013년에서 왔다는 걸 증명해 줄 수 있는 물건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혜승의 감정에 호소하는 길 밖에 없었다.



“나 2012년 7월 부터 저 집 511호에 살았어.”

난 마른 침을 넘기며 말을 이었다.

“산지 1년이 조금 지난 2013년 7월 약 먹고 자살을 기도했지. 여자 문제때문에.”

혜승은 고개를 비스듬히 든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죽지는 않았어. 그런데 깨어보니 내 방에 웬 여자가 있더라. 처음 보는 여자가.”

혜승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내 말을 들었다.

“그게 너였어.”

혜승은 풋하고 웃음을 내뱉으며 두 눈을 감았다.

“너 아주 제대로 돌았구나.”

난 혜승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나 안돌았어. 그리고 그때의 너는 산 사람이 아니었어.”

혜승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나도 안다.

시간여행 얘기도 모자라 이제 귀신얘기까지 하고 앉았으니

그것도 본인이 귀신이 되었다는 얘기를 하고 있으니.

상대방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넌 내가 이사오기 다섯달 전에 방에 연탄을 피우고 자살했어. 그게 2012년 2월의 일이야.”

혜승은 내가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반쯤 웃으며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너 좀 재밌다. 이거 너가 시간여행자라는 얘기?”

“그런 셈이지.”

“자, 잘됐네. 다음주 로또 번호라도 좀 가르쳐 줄래?”

혜승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2년전 로또번호를 어떻게 기억하냐?”

“왜 미래로 접속해서 정보 캐오고 그러는거 아냐?”

“난 엄밀히 말하자면 시간여행자가 아니라 2년전으로 곤두박질쳤을 뿐이야.”

“자, 2013년으로는 못돌아간다는 얘기?”

“현재로서는.”

“내가 내년 2월에 연탄 피우고 자살한다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넌 저 방에서 내 귀신을 만났다.”

난 또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무슨 신종 ‘도를 믿습니까’니?”

“나 농담으로 하는 얘기 아냐.”

“그건 그렇고 넌 이름이 뭔데?”

“서승준.”

“첨 들어보는 이름이다.”

“그걸거다.”

“자 서승준, 내가 어떻게 할까? 부적이라도 살까? 조상님 기도라도 드려?”

혜승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만큼은 웃지않고 있었다.

난 또다시 한숨을 쉬고 하늘을 쳐다 보았다.

그리고 나즈막히 노래를 불렀다.



사랑은 어디로 영원할 듯 빛을 발했던

그대는 어디로 모든 것을 줄 것 같았던

어느 저녁 노을 빛깔마저 변해버린 날

사랑은 어디로 떠났나…



난 노래를 한 소절 부르고선 혜승에게 말했다.

“죽은 너가 내 앞에 귀신으로 나타나서는 이 노래를 부르더라.”

그때 혜승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내가 왜 죽었다고 그러디?”

혜승은 팔짱을 끼더니 나에게 물었다.

“너가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대. 그 일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상류사회로 가고 싶어서.”

혜승은 더욱 힘을 주어 팔짱을 끼면서 나를 봤다.

“학교 선배중에 멋있는 사람이 있었다는군. 아우디를 타고 다니는.

그 사람을 차지하기 위해 별짓 다했다더군.”

“서승준…말 조심해.”

“내가 지어낸 말 아냐. 2년후의 너가 나에게 한 말이야.”

혜승의 표정이 아주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 남자가 널 가지고 노는데도 포기할 수 없었데

그 남자가 너가 원하는 걸 다 가지고 있어서.”



그 순간 뭔가가 날아와서 내머리에 부딪혔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내 발밑에는 스마트폰이 떨어져 있었다.

갤럭시 S2였다.

오랫만에 보는 물건이다.

화면은 밝게 빛나고 있었지만 유리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 순간 머리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내리는게 느껴졌다.

손을 머리에 짚자 새빨간 피가 묻어 났다.

몇걸음 앞의 혜승이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난 머리에 난 상처를 손으로 부여잡고 혜승에게 말했다.

“팔일째의 매미를 아니?”

혜승의 눈이 커지는 것이 보였다.

“혼자 살아남은 팔일째의 매미는 고독해서 슬플까,

아니면 누구도 못 본 팔일째의 아침을 맞아 행복할까?”

나의 질문에 혜승은 얼음처럼 굳어졌다.

내머리에선 따뜻한 피가 뚝뚝뚝하고

볼을 타고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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